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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병대전략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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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한국 군사전략 변천(II)
작성자 김현기 작성일2011-11-18 오전 1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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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자주국방태세의 기반구축(19701989)
 
1. 전략환경
 
가. 70년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북아시아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과 소련이 지배하는 공산세력으로 양분 대립되었던 양극체제가 미국, 소련, 중공, 일본으로 형성되는 다원화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소련의 주도권에 도전하기 시작한 중공이 국제정치에서 하나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등장하려는 시도와 접목하여 미국과 일본이 중공과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1972년 9월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중공과 정식으로 수교하였으며, 1978년 8월에 일중공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는 밀착되었다. 미국도 중공과 4반세기를 유지해온 절연과 대립을 청산하고 1979년 1월 1일을 기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미국과 일본이 중공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미일중공은 국제정치적으로 3각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들 3국은 소련 세력의 확장을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다같이 반소 패권주의에 동의하고 공동보조를 위하여 상호간에 모든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3국간에 전쟁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미국의 데탕트 정책에 의하여 1972년 2월 닉슨 미 대통령의 중공 방문 이후 중공이 개방을 시작하면서부터 동북아시아의 양극화된 역학관계가 미소일중공의 다극화 체제로 바뀌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공 또한 소련을 제1의 적국으로 인식함으로써 소련의 위협을 막기 위하여 미국, 일본, 서구제국과 제휴하여 광범위한 반소 전선을 구축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반면 소련은 미일중공의 3각 협력체제에 도전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베트남 및 아프가니스탄과 제휴하여 중공을 포위했을 뿐만 아니라 서태평양에 극동함대를 증파하여 일본의 안보까지 위협하였으며,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진출하여 쿠바 고용군을 이용한 세력확장에 안간힘을 다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중공이 소련을 패권국으로 간주하는 전략 개념에 동조하고 소련을 견제하는 데 중공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즉, 미국은 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일본 및 중공과의 3각협력관계가 대소 견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중공과 일본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세력균형 정책에 동조하였다. 물론 미국과 일본은 조약상으로 반패권 원칙이 어느 특정한 제3국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명문화하였지만, 실제로 그것이 소련을 대상으로 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미일중공 3국은 안보공동체적 성격의 밀접한 3각협력체제를 구축하게 되자, 경제적 측면에서도 협력을 추구하였다. 일본은 중공과 1973년 12월 12일 통상협정을 체결하고 1990년까지 약 1,000억 달러의 교역을 약속하였으며, 미국은 중공과의 수교에 따라 경제협력을 확대하였다.
중공은 4대 현대화 추진을 위해 많은 외화가 필요하게 되자, 종래의 자력갱생 원칙을 수정하여 차관도입을 위해 미국 및 일본과의 교역을 확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호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미일중공의 화해는 안보 및 경제면에서 상호협력을 증진시키게 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미국과 일본 대 소련과 중공의 협력체제에서 미국일본중공 대 소련으로 바뀌게 되었다.
 
(1) 미국의 동향
미국은 월남전으로 말미암아 국론이 분열되고 세계의 경찰국가로서 국력 소모에 대한 비판과 그 한계가 지적되어 미국 내에서 미국이 월남전에서 명예로운 후퇴를 하기 위해서는 중공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1972년 2월에는 닉슨 대통령이 북경을 방문하여 미중공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중공과의 대결상태를 완화하여 아시아의 정세안정과 평화유지를 위한 상호관계 개선 및 제한된 협력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 수뇌들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공존관계를 재확인 함은 물론, 전략무기제한협정을 비롯한 6개의 협력 및 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미소 통상협정까지 체결하여 획기적인 상호 관계개선을 가져오게 하는 한편, 제반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한편 일본과는 1972년 9월 하와이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의 자주적, 평등적 입장을 인정하고, 일본의 지역내 역할증대를 기대하여 극동에서의 역할 분담을 시도하는 등 대외정책의 구현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세계의 다극화 체제에서도 미국의 세계적 패권과 실리를 계속 확보할 수 있는 기반강화에 주력하였다.
한국에 대한 정책은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전통적인 우의에 기반을 두고 미국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국제적인 지지와 지원은 물론 군사, 경제적 협조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닉슨 독트린의 일환으로 1971년 3월 주한 미 제7사단을 철수시킴으로써 주한미군은 판문점을 제외한 휴전선에서 18년만에 제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주한 미군의 재배치 계획에 따라 서부전선에서 철수 이동한 미 제2사단을 주축으로 한 미 제1군단은 한미 제1군단으로 재편되어 한국군 제1사단제25사단제6군단해병대 제5여단과 태국군 1개 중대(72. 6. 23. 한국 철수) 등을 작전통제하는 자유진영 최대의 군단이 되었다.
그 후 미군은 주한 미 제2사단의 장비증강을 추진하면서 병력의 현수준을 유지하였으나 1977년 새로 취임한 카터 미 대통령은 미 제2사단마저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하였으나 주한 미군 철수는 전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주한 미 제8군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의 주장과 상하 양원 및 미국내 각계의 강력한 철군반대 그리고 한국을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게 할 것이라는 여론에 밀려 결국 1979년 7월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수정하였다. 한편 대소()전략 우선주의를 지향하였던 미국은 중공을 미국의 대소련 전략균형에 기여하는 요소로 이용하려는 새로운 동북아시아 세력재편을 적극 추진해 왔다. 그러나 소련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여 서태평양 방위정책을 종전의 소극적인 방향에서 오히려 적극적인 방향으로 재검토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즉, 인도지나에서의 적극적인 소련의 세력확장 추구와 특히 중월전쟁을 계기로 한 소련 해공군력의 급속한 질양적 증강, 이란 사태와 남북 예멘간의 국경분쟁 등 페르시아 주변 정세의 불안정, 소련과 북한의 재접근 가능성, 북한군 전력의 대폭적인 증강 등은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전략상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영향요인으로 대두되었다.
미국은 이 같은 정세발전에 대응하는 노력으로 페르시아만 주변해역에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한 제7함대 일부 세력과 지중해에 있는 제6함대 일부 함정을 파견하여 소련을 견제하면서 장기적인 전략적 조치의 일환으로 새로운 제5함대 창설을 검토 중에 있었으며, 서태평양지역에서의 대소 군사력 균형유지를 위한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 1척의 추가 배치 및 F-14, F-15 등 신예전투기와 E-3A 공중조기경보기 등의 배치 추진, 그리고 새로이 건조되고 있는 트라이덴트 핵미사일 잠수함의 태평양 집중 배치계획 추진과 주한 미 지상군의 단계적 철수계획도 잠정적으로 보류하는 등 새로운 신축성 있는 동향을 보였다.
 
(2) 소련의 동향
1970년대에 들어와 아시아 집단안보체제를 내세우고 월남전 이후의 아시아정책을 모색하던 소련은 다국관계로의 발전을 시도하여 1971년과 72년에 각가 인도 및 이라크와 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대일본 관계에도 유연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방대한 해군력의 아시아지역 배치와 증강으로 소위 를 병행하였으며, 한반도를 그들의 전통적인 남진정책의 요충지이며 중공 포위망의 일환으로 보고 북한에 최신 항공기를 비롯한 군사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정유공장, 화력발전소 등 공장의 신설 및 확장을 지원하는 등 대북한 접근을 적극 시도하였다.
그 후 소련은 월남전의 종결과 미일 중공의 접근을 반소적 제휴관계로 보고 새로운 세력재편에서의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는 한편, 세력재편의 불안정한 과도기를 최대한 이용하여 세력을 전격적으로 확대해 나가기 위해 아시아 및 중근동 국가에 대한 대외정책을 강력히 추구하였다. 이에 따라 1978년 11월 소련월맹 우호협력조약에 이어 12월 소련아프가니스탄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월맹을 사주하여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케 하였으며, 중공에 대한 도전을 강화토록하여 중월전쟁을 야기시켜 현대화 계획을 서두르고 있는 중공에 경제적 타격을 주고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선전함으로써 중공의 입장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월맹이 공산통일 된 이후 중월전쟁을 계기로 인도지나지역의 와 월맹 내에 군사기지를 획득하고자 노력해 오던 소련은 월맹 지원의 명분으로 월맹내 다낭 및 캄란 기지의 소련 군사기지화를 실현시키는 한편, 키에프급 항공모함인 민스크호의 태평양함대 배치를 단행하고 백파이어 폭격기의 극동기지 배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 본토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SSN-18 미사일을 탑재한 델타 형 핵추진 잠수함을 오호츠크해에 배치하는 등 친소 세력권을 전격적으로 확대하고, 미 해군력에 도전하기 위한 해공군력 대폭 증강에 주력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주변정세의 새로은 변화를 촉진하였다. 특히 소련은 이란사태에 발목이 잡힌 미국의 허점과 대탕트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전통적인 남진정책에 따라 1979년 12월 25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카터 대통령 취임 이후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미소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3) 중공의 동향
중공은 소련을 제1의 적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월남 전후에 미군의 철수로 인한 힘의 공백기를 이용, 소련이 아시아에 진출하여 인도-동남아시아-일본을 연결하는 새로운 중공 포위망의 형성 시도에대비하기 위하여 북한, 월맹, 파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는 물론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제국과의 각종 협정과 접근정책을 추진하여 새로운 제3의 세력형성을 시도하였다. 또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억제하기 위하여 대미, 대일 접근을 비롯하여 유연한 대외정책을 추구하는 등 장차 아시아에서의 주도권 장악에 주력하였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대소련 및 일본관계의 완충지대로서 해양세력의 대륙진출을 저지하는 전초라는 전통적 가치성을 중시하고, 1971년에 체결한 조중 무상군원협정에 의거 대북한 군원을 계속 강화하는 동시에 1972년 12월 외교부장의 방북을 통해 북한의 통일방안 지지, 미군 철수 촉구, 국제사회 진출 및 6개년 경제계획 지지 등에 합의하여, 북한의 후견인적 유대를 강화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일중공 평화협정의 체결(1978. 8. 12)과 미중공 관계정상화(1979. 1. 1) 실현으로 미일중공의 3각 협력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서방과의 군사적 대립관계가 완화되어 대만해협지역에 배치된 군사력의 일부를 중소 국경과 중월 국경지역으로 이동배치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으나 소련의 강력한 배후지원을 받는 월맹의 캄보디아 전면침공과 국경에서의 도발로 인한 중월전쟁의 발생으로 실질적인 면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대월맹 응징의 명분으로 국제적 체면과 위신을 어느 정도 만회하는 효과를 얻기는 하였으나 경제적 타격과 국제적 여론의 악화등으로 입은 손실도 적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4대 현대화 계획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과 군장비 현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 경주함으로써 전쟁억지력으로 가장 효과적인 ICBM은 전 소련 영토를 공격 가능한 CSS-4 미사일을 실전 배치할 단계에 도달하였으며, 공군 현대화를 위한 F-12 전투기 개발과 현대화된 해군력 건설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편 중공은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과 일본의 재침에 대처하기 위하여 1950년 2월 소련과 체결한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소련에 정식 통보함으로써 중소 대립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4) 일본의 동향
미중공간의 화해 접근이 일본의 국가이익에 큰 위협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한 일본은 1972년 9월 다나카() 수상의 북경 방문을 통하여 일중공 관계를 정상화시킴으로써 종전의 대미 추종관계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경제적 실리추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노골화하였다. 따라서 일본과 중공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아시아 정치, 경제질서를 모색하는 한편, 소련과도 북방영토의 해결과 시베리아 개발 참여에 의한 경제제휴를 시도하는 등 대소련, 대중공, 대월맹 등 대공산권 접근을 위해 활발한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동시에 군사력 증강에도 치중하였다. 한편 일본은 한국을 공산세력 저지의 방패로 간주하면서도 대공산권 교류를 추진하였고, 북한과의 무역교류 등 실리추구에 급급함으로써 북한의 전쟁수행 능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한편으로는 등거리 관계 수립으로까지 발전시킴으로써 미군의 존재의의 및 유사시 기지이용 등에 대한 새로운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1970년대 후반, 아시아지역 주둔 미군의 계속적인 감축추세와 소련 극동 해공군력의 급속한 증강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일본은 주일 미군 유지비에 대한 분담을 크게 증대하고, 유사시 미일 공동대처방침을 미일 안보협의위원회에서 채택하는 등 방위협력의 실질적 강화에 주력하였다.
1978년 3월 일본은 새로운 제5차 방위력정비 5개년계획(19801984)의 지침을 결정하고, 이미 계획된 F-15 전투기, P-3C 대잠초계기, E-2C 공중조기경보기 등 신예항공기의 도입을 적극 추진하는 동시에 대형 헬기 호위함의 건조 증가 등으로 대공, 대잠전력 향상에 박차를 가하고 육해공 자위대의 유사시 즉각 전투에 임할 수 있는 태세 강화에 주력하였다.
일본의 제5차 방위력정비 5개년 계획은 1976년 10월 일본 각의에서 결정된 방위계획 대강을 기조로 소위 기반 방위력 정비목표의 범위내에서 방위력을 정비강화 해 나가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방위력 강화를 위한 장비정비계획은 소련 극동 군사력의 급속한 증강하에서 자체의 독자적인 방위체제 강화, 미국이 희망하고 있는 대공, 대잠능력 강화에 중점을 두고 방위비를 GNP의 1%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일본이 미국에 안보를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실리만 추구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는 등 대미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일본이 제5차 방위력 정비 5개년계획을 완료하게 되면 일본의 군사력은 비핵전력면에서 사실상 지역군사 세력균형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막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일본은 이러한 장비의 질적개선 추진과 함께 자위대 작전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예비전력 그리고 잠재군사력 확보에도 많은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주변국으로 하여금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였다.
 
(5) 북한 정세
김일성은 1970년 11월 노동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남한에서 인민들이 요구할 때는 언제든지 나가 싸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지형조건을 잘 이용하여 산악전과 야간전투,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한다면 비록 잘 무장한 적이라도 격퇴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전쟁준비의 완료를 독촉하였고, 앞으로의 전쟁양상을 명백히 하였다.다시 말해서 북한의 대남전략은 무력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판단되었을 때에는 언제든지 비정규전 부대를 육상해상공중으로 침투시킨 다음 후방지역에서의 제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주요 군사 및 산업시설, 주요 행정시설 기능을 파괴하여 전쟁지도 능력을 조기에 마비시키는 한편, 전선에서의 정규전을 유리하게 전개함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겠다는 이른바 비정규전과 정규전의 배합으로 속전속결하겠다는 것이었다.
1972년 12월 27일 북한은 소위 사회주의 신헌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초권력적인 지휘체제를 확립하였고, 4개 군사노선의 관철과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6개년 경제계획의 조기 달성을 도모하는 한편,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북한주민들의 사상적 동요와 이완을 불식시키기 위해 모든 노동계급의 혁명사상 고양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유연성을 유지하는것과는 달리 내적으로는 국민학교의 각종 교과서에까지 반미구호 및 선전을 실어 광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북한 화해무드를 조성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고랑포, 철원에서 남침용 땅굴을 굴착한 사실이 차례로 발견됨으로써 그들의 대남적화 야욕을 입증하였다. 또한 정규군 이외에 각종 경비대 5만명, 노농적위대 145만명, 붉은 청년근위대 75만영 등 정규군과 맞먹는 비정규전부대를 대폭적으로 강화하였으며, 1969년에 창설한 특수8군단을 5개 여단 40개 대대 25,000명으로 증원시키는 한편, 경보병여단을 11개 여단 88개 대대 54,000여 명으로 증강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해서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는 한편, 지상군 부대들을 38선 부근으로 재배치 하는 등 전쟁준비를 완전히 끝내고 언제든지 남침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 80년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북아지역의 세계 전략적 비중이 증대됨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힘의 우위확보 경쟁전략을 지속하는 한편, 상호간의 평화공존 관계유지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은 역내 역할증대라는 실리추구를 위해 독자적인 정책을 지향하는 동시에 미소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로 인해 동북아지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미소중일 4개국들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중심무대가 되고 있었으며, 각국은 기존의 전략적 이점을 유지하려는 입장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본질적인 전략적 경쟁이 지속되었다.
미국의 이 지역에 대한 상대적 영향력 감소현상과 소련의 진출강화, 중국 및 일본의 국력증대에 따른 영향력 확대 노력으로 지역내의 세력구조가 점차 이들 4강대국의 균형체제로 재편되는 추세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등장한 일본과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중국 및 신진공업국들의 출현으로 아태지역의 세계경제상 비중이 현저히 증대괴고 있는 가운데 서방국가 상호간의 무역마찰이 계속 심화되는 한편, 동서국가 간의 경제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미소 간의 중거리 핵 미사일 폐기협정이나 중소 간의 관계정상화,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등으로 긴장완화에 진전이 있었으나, 미소중일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데서 오는 본질적인 전략적 경쟁 상태는 지속되었다.
 
(1) 미국의 동향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미국의 안보 및 경제전략상 사활적인 중요지역이 하나로 계속 중시하고 있으면서도 무역 및 재정적자로 인한 경제난과 국방비의 태폭적인 삭감에 따른 군비증강 계획 및 군사력 규모의 축소 재조정이 불가피한 입장에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난과 국방비 삭감 등의 자체 사정으로 지역의 방위 및 안보책임을 지역국가와 분담하는 정책을 계속 지향하였다.
 에 있어서는 소련 고르바초프의 지역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새로운 차원의 강도 높은 정치외교적 평화공세 및 군사공세에 직면하고 있는 가운데, 소련의 기도를 봉쇄하고 미국 국력의 재건을 위한 의 재정비 강화노력을 계속하였다. 특히 미국의 대지역 정치외교적인 노력으로 한일비호주지역의 자유우방국들과의 기종 동맹관계를 기조로 한 상호 협력관계를 보다 강화하여 소련의 평화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방벽을 구축하는 한편, 대중국 관계의 긴밀화로 중소 간의 관계 재구축 효과를 상쇄하고 동남아지역 국가 등과의 제반 협력관계를 강화하여 소련의 지역국가 접근에 쐐기를 박는 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전략상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중시하고 있는 일본과는 1986년 10월 미국의 와인버거 및 1988년 칼루치 국방장관의 방일과 1988년 1월 일본의 다케시다() 수상과 우노() 외상의 방미 등을 통해 양국간의 무역마찰 해소와 일본의 방위분담 증대 및 무기개발을 위한 군사과학 기술협력문제 등 현존하는 제반 현안문제 해결과 대규모의 미일 양국군간 합동기동훈련의 연례적 실시 등의 새로운 협력강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 하였다. 준동맹관계에 있던 중국과는 양국의 고위정치군사 수뇌부 간의 교류강화와 중국의 경제, 군사현대화 지원 및 미국의 국제수지 개선을 위한 경제적 교류확대 등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1986년초 집권한 필리핀의 Aquino 대통령을 초청하여 우호를 확인하고 필리핀과의 새로운 기지협정을 체결(1988. 10)하여 기지존속의 기반을 조성하였고 슐츠 미국무장관이 동남아국가연합(ASEAN) 외상회의에 참석(1988. 7)하는 등 동남아 각국과의 관계강화 노력을 지속하였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군사노력은 전진배치 미군 및 증원배비 미군 등의 지역방어배비 미군전력의 현대화와 유사시 대응태세의 재정비 강화 및 이에 병행한 지역 집단방어체제의 새로운 발전 강화 등 2중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미군 자체의 전력증강과 유사시 대응태세 강화는 특히 해공군력에 중점을 둔 각종 신형무기, 장비의 증가배치에 의한 전력의 질적 향상과 항모전단을 주축으로 한 기동타격 전투훈련의 실시를 증대하고 전쟁물자 적재전단의 괌 및 오키나와 사전배치 등에 의한 유사시의 신속반격, 신속증원을 위한 전력운영의 효율성 제고에 역점을 두고 계속 강화하였다.
지역 집단방어체제의 발전강화 노력은 역내 동맹 및 우호국의 방어 책임 증대와 연합작전체제 강화에 중점을 두고 지속적으로 경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정치외교 및 군사적인 대외관계 강화 노력은 시장개방 압력과 미국 산업보호에 주목적을 둔 종합무역법안(1988. 8)의 발동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한편 한반도의 평화 및 안정정착이 동북아는 물론 전세계의 평화와 안정상 중요한 관건의 하나가 되고 있음을 중시하고 있는 미국은 86 아시아 경기와 88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지원하기 위한 정치외교 및 군사적인 노력을 강화함으로써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국가, 민족이 참가한 최대규모의 평화와 화합을 위한 대제전을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미국은 일중소 등 주변 각국과의 한반도 정세 안정을 위한 대북한 관계개선 노력을 지속하는 등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군사부담을 점차로 경감해 나가려는 새로운 정책동향을 보였다.
 
(2) 소련의 동향
소련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소련의 당면한 경제개선과 미래 전략전개상 매우 중요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전략적 이점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이른바 본질적인 계승과 상황적 변용을 함께 추구하였다.
19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소련이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임을 천명한 바 있는 고르바초프는 2년 후인 1988년 9월에 이를 보다 구체화한 7개항의 아태지역 평화안을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을 통해 제안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이 타이인도네시아호주, 그리고 인도차이나반도 내에 위치한 공산제국을 대상으로, 1988년에는 중국일본필리핀 및 북한 등 동북아지역 내에 주요 관심국가를 대상으로 한 화해접근외교를 전개하였다. 이와 함꼐 소련이 1985년 5월과 1986년 7월 전 아시아 회의와 1988년 5월 환태평양 동아시아 회의 등을 제의한 것도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통해 지역내 국가들의 태도완화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소련은 그들이 가장 중시하고 있는 중국과의 화해협력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1986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약 11만 5천명중 6개 연대 약 8,000명을 철수(10. 1527) 시키고, 제1부수상 니콜라이 달라진과 중국의 수상 겸 총서기 간의 회담을 가졌으며, 1987년에는 중국과의 국경회담을 9년만에 재개(2. 7)하는 한편, 몽고 주둔 소련군의 부분철수를 개시(4. 11)하였고, 1988년 2월에는 30년간 지속된 중소 간의 대립을 종식하게 될 정상회담을 실현시키기 위한 외상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관계개선을 위하여 1988년 12월 외상이 일본을 방문하여 북방도서 문제와 극동소련군 증강문제 등으로 비록 관계개선상에 한계을 보였으나 상호간의 평화공존과 경제적 협력증진을 위한 공동노력강화 방침 및 정상회담 개최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는 등 양국 관계개선 증진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조성하였다. 또한 1988년 12월 소련 외상의 필리핀 방문에서는 소련과 필리핀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의 확대와 동남아지역의 비핵지대화, 외국군기지 철수 등을 통한 긴장완화 촉진 및 양국 정상회담 실현 추진 등에 합의하는 등 소련필리핀 간의 관계증진과 미국과 필리핀 간의 관계 이간조장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였으며, 북한 방문에서는 북한의 평화적 통일방안과 남북대화 방침에 대한 상호협력을 비롯한 한국내 미 군사력의 철수 촉구 및 한미일 군사협력의 규탄, 한국과의 정치 및 외교관계 불수립 방침 등에 합의함으로써 소련북한간의 밀착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한편 소련은 극동지역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미일중국간의 반소 연합체제와 지역내 서방국가의 집단방위체제 와해와 미 군사력의 철수를 촉진하기 위한 직간접적인 압력 증대에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1980년대 중반기부터 신예무기의 배치 증가로 급속한 질적 향상을 달성한 극동지역 소련군은 사상 최강의 수준으로 증강되었다.
극동지역 소련군중 지상군은 전체 소련 지상군의 1/4 이상인 58개 사단에 달하였고 이들 전투사단을 T-72형과 T-80형 전차 등을 비롯한 각종의 신예무기로 장비시켜 기동력과 화력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강력한 화학전 전력까지 구비시켰으며, 새로운 공중강습여단과 특수전여단 등이 추가 배치되어 고도의 전격기습전 전력을 보유한 가운데 유사시를 상정한 전투훈련을 강화하였다.
소련 해군의 4개 함대중 최대 규모인 태평양함대는 전체 소련 해군전력의 1/3을 상회하였으며, 항공모함 2척과 대형 핵 순양함, 상륙함, 전략핵잠수함 등 각종 신형 전투함정을 주축으로 한 900여척의 세력으로 증강되어 제해권 확대 및 강화를 위한 작전활동을 계속 증강하였다.
태평양함대의 동향중 특히 주목되고 있는 것은 각종 함대의 급속한 현대화와 이에 따른 전략전술의 새로운 전환 및 계속 강화되고 있는 소련북한 해군간의 연합훈련으로서 이는 모두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중시한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의 새로운 동향이었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미래의 소련 군사전략을 예시해 주는 중요한 징후였다.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소련은 태평양함대에 최근 건조한 신예함의 50%를 배치하여 그 질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이와 병행하여 방어 위주의 전략전술을 공격 위주로 전환하여 실전훈련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1986년부터는 매년 10월에 북한 해군과 연합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사실상의 공동군사체제 구축에 주력하고 있는 등 아태지역 군사 패권장악을 목표로 적극적인 공격 전력을 강화하였다.
 
(3) 중국의 동향
중국은 국력의 선진화 달성과 당면한 안보상의 실리 및 미래 전략상 유리한 여건의 확보를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한 대내적인 정치경제군사 등의 체제개혁과 지역안정을 위한 대외관계 개선의 강화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하였다. 즉 중국은 소련의 팽창견제와 자국의 4대 현대화 계획의 완수를 위해 한미일 및 서구 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지역적 현상유지를 목표로 인접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였다. 특히 중국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아시아 경기대회와 서울올림픽대회 참가를 비롯하여 한국과의 경제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한 관계개선을 희망하는 등 한반도의 안정을 지향하는 정책을 펼쳤다.
중국의 안보상 최대 관심사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군사전략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는 중소 국경선상에서 소련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한반도와 동만주를 통한 포위전략을 통해 소련의 군사적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7,5000km의 중소 국경선상에 배치된 소련군의 존재와 전략핵무기를 제1차적인 위협으로 인식하였으며, 그밖에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 등 주변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위협요소로 고려하였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중국으로서는 그들의 정치 및 경제적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안정된 안보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중국은 핵 억제력 및 방대한 재래식 전력에 의한 대소련 대비태세를 강화하는 동시에 미일 등 서방세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동서 화해분위기를 이용한 소련과의 대화를 재개하는 등 다양한 수단의 안보협력을 전개하였다.
동남아지역에 대해서 중국은 그들의 전통적인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소련과 베트남간의 관계를 견제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하였다. 특히 1988년 3월 중국은 남사군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베트남과 해상무력 충돌을 일으켰고, 그 후 쌍방은 이 지역에 해군력을 증강하였으며, 전면적인 무력충돌은 자제하였지만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무력시위는 계속하였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비교적 온건하여, 군사적인 해결보다는 정치적인 국구통합에 목표를 둔 경제적인 협력과 교환방문 등 다원적인 교류를 증진시킴으로써 양측의 관계는 상당한 수준으로까지 개선되었다. 중국의 대내적인 개혁은 1986년 5월부터 의 백화제방백가쟁명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12월에는 학생소요가 일어나고 그 후 1987년 여름에는 한때 보수파의 반발이 일기도 하였다. 1987년 10월 25일 개혁파는 공산당 제13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자본주의 경쟁요소 도입, 당정분리, 정치경제개혁을 재확인 하였으며, 1988년 3월에 개최된 제7기 인민대표대회에서 향후 5년간의 정책중점을 개혁의 가속화와 생산력의 향상에 두고 이에 상응하는 국방력 강화에 주력할 방침을 천명하여 이에 따른 제분야의 개혁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정부의 의욕적인 개혁정책과 기본적인 국내여건 간의 현저한 괴리와 개혁정책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정책지도상의 과오로 인해 악성 인플레와 국민의 물질만능주의 팽배 및 사상무장의 해이 등 심각한 부작용에 직면함으로써 중국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한 궤도수정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외교는 대소련 화해의 회복 및 대미국 협력관계를 중심으로 안보환경의 안정화와 국가 현대화에 필요한 자본, 과학기술의 도입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소련과는 1987년 2월부터 수 차례의 국경회담을 갖고 1969년 다만스키() 충돌사건 이래 유지되어온 대립적 관계의 전환을 시도하였으며, 1988년 10월에 등소평은 중소 정상회담을 제의하는가 하면, 12월에는 전기침 외교부장이 소련을 방문하여 관계정상화 및 경제협력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미국과는 계속 전략적 협력관계를 발전 및 강화시켜 나간다는 기본방침하에 와인버거 미 국방장관 초청(1986. 10), 미 해군함정의 청도 기항 허용, 양상곤 국가군사위 부주석의 방미(1987. 5), 오학겸 외교부장의 방미(1988. 3)에 뒤이은 후임 외교부장 전기침의 방미(1988. 9)와 슐츠 미 국무장광(1988. 7) 및 칼루치 미 국방장관의 방중(1988. 9) 등으로 군사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특히 중국은 대북한 관계에서 왕해() 공군사령관, 국가주석, 주량() 당 대외부장, 국가주석 등의 북한 방문과 북한 김일성의 방중, 노동당대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김영남 부총리 등의 중국 방문을 통해 혈맹적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노력은 1988년 3월 중국 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이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중국군의 계급제도 부활, 문민 우위제도의 도입, 군사전략 전술의 현대화 노력 강화와 병력 불감축 등 중국군 개혁과 관련한 방침을 천명 하였듯이 중국군 병력의 자질향상과 무기, 장비의 개선 및 현대화 그리고 전략전술의 개발 등으로 유사시의 적극방어를 위한 태세와 전력강화에 역점을 두어 경주되었다. 그리고 중국은 외국의 선진 과학기술 및 장비의 도입에 필요한 외자획득과 군사적 영향력 신장을 위한 제3세계권 무기수출 확대노력을 계속 강화하였다. 한편 군사외교 노력은 1986년 미국 함대 및 캐나다 해군 함정의 청도 해군기지 방문 등 서방세계 해군에 대한 문호개방을 점차 확대하는 한편, 북한과는 여러 고위책임자들의 빈번한 상호교환방문에 의한 동맹관계의 가일층 공고화로 북한의 지나친 대소련 밀착과 중국의 뜻에 반하는 군사행동을 견제하기 위한 영향력 유지에 주력하였다.
 
(4) 일본의 동향
일본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시대의 개막과 이에 따른 소련의 정치외교군사 전략적인 대지역 공세강화와 중국의 대미국 및 대소련 양면접근을 통한 지역 내에서의 정치군사적 비중 증대 노력 및 미국의 경제 및 군사능력상의 한계성과 소련의 도전 강화를 감안한 대지역 전략의 재정비강화 등 동북아 주변전략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불안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계속적인 경제성장과 안정적인 안보환경의 확보를 윟나 새로운 차원의 대내외적 노력을 계속 강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의 경제 및 안보상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는 대미국 관계에서는 미일 안보조약에 의한 방위체제를 1987년 양국간의 역할분담을 명시한 미일 방위협력지침에 의해 보완 발전시키고, 이 지침에 다른 연합작전으로 지역 안전과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미국과의 군사기술협력과 연합훈련을 강화하였는데, 1986년 4월 미국이 요청한 SDI 참여의 수락, 연례 미일 안보실무회의헤서의 극동 유사시 공동작전 연구와 작전의 상호운용성 제고에 합의 , 1980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 합동훈련(RIMPAC)에 해상자위대 참가, 미일 3군통합 연합훈련 및 쳍 GNS 훈련, 미 항모전단과 일 해상자위대 간의 대잠수함전 및 대소 반격작전훈련, 미일 해군 및 미일 공군 합동훈련을 비롯한 각종 연합훈련의 실시, 양국 국방장관의 회담에서의 대소, 대잠 정보센터 및 공동훈련시설 설치합의, 일본의 군사시설 제공의 결정, 그리고 양국간의 정상회담에서 경제 및 방위 등 모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합의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일 안보협력 관계의 공고화와 미국의 재정적자 경감지원 등 대미국 경제협력의 차원에서 주일 미군 유지비의 일본측 분담증대를 위한 특별협정을 체결하고 유사시 미군 증원에 대비한 일본측의 지원문제에서도 진전을 보였다. 또한 일본이 당면한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는 소련과는 1986년 아즈히포트 소련 제1부수상의 일본 방문, 바베() 외상의 소련 방문 등 관계개선의 노력이 있었으나 1987년에는 스파이사건으로 양국이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양국관계가 다시 냉각되었다. 그러나 1988년에 접어들어 나카소네() 전수상의 소련 방문과 소견 외상 셰바르드나제의 일본 방문 등을 통하여 상호간의 관계 개선 노력이 재개되었으나, 북방 4개 도서문제에 대한 양국간의 의견 대립 지속과 극동지역 소련군의 철수문제 등으로 별다른 진전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양국은 상호간의 경제교류 증진 및 평화조약체결을 위한 공동노력 강화의 필요성에 합의함으로써 새로운 관계개선 통로 개척에 접근하는 동향을 보였다.
중국과는 나카소네 수상의 방중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의 교과서 내용수정과 광화료(: 일본에 있는 중국 학생기숙사)에 대한 일본법정의 판결 및 일본의 방위력 증강과 대중국 무역흑자 문제 등으로 정치적으로 다소 갈등을 겪기도 하였으나 공산권국가들과의 경제 및 안보상 실리증진을 위한 경제교류는 계속 확대되는 추세에 있었다. 특히 중국을 방문한 다케시다() 수상의 대중국 총 62.3억 달러의 대규모 차관제공(199095) 약속과 상호간의 주요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및 양국간의 투자확보협정 체결, 일본측의 중국 환경개선사업에 대하 원조의 제공, 산업과학기술협력 제공의 확대 등으로 경제적으로는 양호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대서구 관계에서는 다케시다 수상의 서구 각국 순방을 통한 일서구 간의 정치적 관계의 긴밀화와 무역마찰 해소를 위한 노력을 계속 경주하였으며, 동구 각국 및 제3세계권 국가와도 경제교류 강화를 통한 시장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은 대아랍 산유국 및 아시안(ASEAN)과의 협력 증진을 통한 자국의 실리증대 및 국제적 지위강화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또한 일본은 자체방위력 강화를 위해 국가안보전략을 군사적 중시전략으로 전환하여 대미 연합작전과 독자적 방어능력을 함께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이를 위한 5개년(198690)간의 신5개년 방위력 증강계획을 적극 추진하였다. 일본은 1,000마일 해상교통로 방위와 유사시 3해협 봉쇄 및 적군의 상륙을 해상에서 격파하기 위한 군사능력을 확보하게 되면, 자국 뿐만 아니라 역내 방위의 일부까지 분담하게 된다는 새로운 차원의 정책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일본은 그들의 안보 및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중요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정착 및 미래의 대한반도 영향력 신장 강화를 목적으로 한 대미국소련 협력관계 유지와 사실상의 대남북한 등거리관계 구축에 주력하는 한편, 필요시 적절한 대한반도 군사대비책까지 신중하게 강구하고 있었다.
 
(5) 북한 정세
북한은 1980년 10월에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표면화된 김정일의 권력세습체제를 공고화하는데 주력하면서 침략도발을 위한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전력을 집중하였다. 특히 1982년 2월 16일 김정일의 40회 생일과 관련시켜 그를 주체혈통의 유일 계승자라고 공포하고 주민들에게 절대적 충성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83년 4월 5일 최고인민회의 체7기 2차 회의를 개최한데 이어, 6월 15일에는 당중앙위 제6기 7차 전원회의, 11월 29일에 당중앙위 제6기 8차 전원회의를 각각 개최하고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3명 전원과 정치국위원 및 비서와 중앙위원 등 총 20명을 개편하였으며, 외교부장 허담을 정치국위원으로 승격시킨 이외에 정치국위원 김영남을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임명하였다.
북한의 이같은 인사개편은 1980년 제6차 전당대회 이후 가장 대폭적인 인사조치로서 주로 김정일의 측근을 등용시켜 세습체제의 기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제6차 전당대회까지만 하더라도 당서열이 4위였으나 1983년의 각종 행사 참가시에는 명실 공히 김일성의 뒤를 이은 2위로 부상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1984년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2회에 걸쳐 직접 주재하고 당면한 경제정책방향과 1985년의 경제건설 과제를 결정하는 등 최고 실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노동당 정치국과 중앙군사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하여 팀스피리트 훈련에 대응하는 전군의 전투동원태세 명령을 하달하였다. 또한 중국의 호요방을 비롯하여 비동맹국인 말타, 남예멘 등 5개국의 수상들을 각각 초청하여 비동맹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소련 및 폴란드를 비롯한 7개국의 동유럽 공산권을 1984년 5월 16일부터 7월 1일까지 순방하여 정치적 친선과 경제협력 관계를 진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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