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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碩士學位論文)韓半島에서의 駐韓美軍의 役割展望-第 2 章 美國의 對韓半島政策變化에 따른 駐韓美軍의 變遷過程
작성자 이정윤 작성일2008-11-20 오후 2: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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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2 章 美國의 對韓半島政策變化에 따른 駐韓美軍의 變遷過程

 


第 1 節  國際政治에 있어서의 軍事力의 役割


    國際政治에 있어서 한 국가가 국가 이익을 위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軍事力을 사용하여 왔으며 비록 군사력이 갖는 暴力行爲 뿐만 아니라 그 존재자체가 정치적 도구로서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 (Karl von Clausewitz)는 “戰爭은 단지 政治的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수단이며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적 행동의 계속”으로 定義하고 있다.
      또한 「로버트 아트」(Robert J. Art) 는 국제정치에 있어서의 軍事力의 役割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 국가는 왜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가?  둘째, 군사력은 어떠한 방법으로 이용될 수 있는가? 그는 국제정치에서는 국가들간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紛爭을 해결해 줄만한 勢力과 權威를 가진 單一機關이 없기 때문에 힘의 사용에 있어서 야기되는  問題들을 提起하여 그의 理論을 다음과 같이 展開하고 있다.
    첫째, 모든 국가는 자기 힘으로 防衛하여야 한다. 어느 국가도 타국의 善意에 장기간 믿을만하게 依存할 수 없으며 오늘의 友邦이 내일에도 友邦으로 남아 있게 될것이라고는 豫測할 수 없다.
    둘째, 모든 국가는 物理的 安保(physical security)에 대비하여야 한다. 안보의 개념은 다른 국가의 軍事的 攻擊으로부터 自國을 보호하는 한 국가의 能力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국가는 항상 物理的 防衛를 위한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여야 한다.
    셋째, 각국은 모든 국가들과 長期的이고 완벽한 利益에 관심을 쓰기보다는 他國과 관련된 단기적인 立場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한다. 즉, 국가적 利他主義(state altruism)가 아니라 국가적 이기주의(state egoism)가 모든 국가 행위의 信條인 것이다. 따라서 各國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物理的 힘 (physical force)인 軍事力을 사용하는 것이다.
    넷째, 모든 국가들은 戰略的 相互依存이라는 입장에 놓여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가는 他國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自國의 運命을 완전하게 操縱(control)할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국가도 他國의 이익과 전략을 이해하고 이에 대비하여 自國을 방위해야 한다.
    다섯째, 국제사회에서의 모든 국가들은 道德的인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수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不道德的行態나 不法的인 行動을 억제할수 있는 有力한 정부가 없기 때문에 각국간의 協商이나 合意에 의하여 공통된 利益을 追求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때에도 군사력을 포함한 국가의 힘과 능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요소들은 한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체의 힘으로, 또는 국제사회에서 他國과의 상호 협조에 의하여 공동 이익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상당한 군사력이 必須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國際政治안에서 모든 국가들은 그들의 政策目標 달성을 위한 外交力 향상을 위하여는 軍事力이 필요하며, 이러한 군사력은 반드시 物理的인 暴力으로 사용할 필요는 없으며 적에게 威脅을 전파하여 軍事力 사용을 억제하는 制動裝置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平和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먼저 戰爭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格言이 있다. 그러므로 군사력은 국가를 保衛하고 국제 정치사회에서 國家利益을 위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필수적인 手段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그들의 政治的 目的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하여 왔으며, 주한미군도 그들의 한반도 내지는 東北아시아 政策實現을 위하여 사용하여 왔다고 볼수 있다. 


第 2 節  駐韓美軍의 韓半島 駐屯背景 및 根據


    주한미군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終結되면서 동년 9월 8일 美 제24軍團 병력 7萬餘名이 戰勝國으로서 한반도에 주둔하기 시작하여 38度線 이남지역에서 軍政을 실시하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政府樹立으로 美軍政時代가 終結되고 미군은 1949년 6월 29일 500餘名의 軍事顧問團을 남겨놓고 철수하게 되었다. 미국은 제2차대전후의 심각한 財政負擔과 減縮된 병력을 有用하게 활용하기 위하여 「유럽」의 戰略的 價値에 優先하여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하게 된 것이다.
    또한 1950년 1월 12일 「에치슨」 미국 國務長官의 한반도를 除外한 太平洋 防禦線에 대한 宣言으로 북한 및 그 支援國들에게 所謂 “韓半島의 完全한 解放”을 빌미로 南侵을 자극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勃發하자 미국은 그들의 對 韓國 消極支援 政策과는 반대로 「유엔」軍의 名目으로 8개 師團 32만명을 참전하게 하였다.
    미국이 이와같이 한국전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參戰하게 된 이유는 한반도에서 共産侵略에 대하여 한국을 방위한다는 對「유엔」의 名分외에도 다음과같은 미국의 세계 전략상의 動機가 있었다.
    첫째, 한국전쟁은 蘇聯의 체코侵攻(1948) 및 베르린 封鎖이후 「나토」(NATO)가 결성된지 1년도 안되어서 발생함으로서  對蘇聯 封鎖政策은 友邦國에 대한 미국의 義務라고 생각하고 參戰하게 되었다.
    둘째, 한국의 방어는 아시아및「유럽」국가를 포함한 自由 友邦國들에 대한 미국의 信賴性 問題와 직결되며, 蘇聯에 대한 미국의 意志를 誇示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蘇聯의「스탈린」이 1946년 2월 9일 西方 자본주의 국가와의 不可避한 정의의 전쟁을 주장한후 世界平和 威脅에 대한 연속적인 挑發로 한국전쟁은 세계 자유국가들에 대한 중대한 威脅으로 看做하였다.
    넷째, 한반도 자체의 중요성보다 일본이 戰略的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한반도 共産化는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判斷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에 대한 「유엔」軍의 개입은 당초 북한의 武力南侵을 沮止하고 한반도에서의 국제적 平和와 安全을 回復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나 中國의 介入으로 擴戰의 兆朕이 보이자 미국은 「유엔」總會를 통하여 休戰에 관한 決議案을 제의하였으나 共産主義 국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미국은 蘇聯과의 合意하에 중국․북한과 직접 휴전을 위한 회담을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하였으나 한국은 이에 적극 반대하면서 통일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單獨으로라도 싸울것을 주장하였으나 휴전으로 한국전쟁을 終結지으려는 미국의 확고한 意志는 변경시킬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의 武器供給을 비롯한 政治的․經濟的․軍事的 지원없이는 한국이 단독으로 싸울 능력이 없었고, 더우기 한국전쟁의 性格이 美․蘇 兩 陣營間의 전쟁으로 발전된 國際的 性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超强大國을 中心으로 국제 정치적 從屬性과 국가 生存의 對外 依存性을 가진 한국은 統一問題에 관해 獨自的으로 국제정치를 조정할 능력은 더욱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한국의 이승만 大統領은 미국에게 「韓․美 相互防衛條約」 締結을 제안하여 한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미국의 확고한 保障을 要求하였다.
    이 大統領의 제안의 骨子는 첫째, 적이 한반도에 공격행위를 개시할 경우 미국이 즉각 개입할 것, 둘째, 한국의 軍事力 强化를 위하여 武器, 彈藥 및 一般 兵站物資를 지원해 줄 것, 셋째, 한국군이 공산군에 對敵할 수 있을 만큼 강화될 때까지 미국 海․空軍을 계속 주둔시킬것 등을 要求하는 것이 었다. 결국 미국은 共産側과 1953년 7월 17일 休戰協定을 締結한 후 한국과 「韓․美 相互防衛條約」을 맺게 되었다. 이로서 美軍은 한국에 계속 주둔하게 되었고 한국전쟁은 韓美關係를 종래의 소극적인 傍觀主義 政策에서 積極的인 同盟關係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휴전에 따라 2개 師團만 남겨놓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게 된 根據로서 「韓․美 相互防衛條約」의 성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韓․美 相互防衛條約」은 한국의 직접 威脅 要因인 공산침략으로 부터 한국을 방위한다는 必要性에 따라 출발하였으며, 미국은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한국의 안보가 태평양지역에서의 平和 構圖의 일부라는 미국의 持續的인 關心을 정식으로 표명한 것이다. 또한 「韓․美 相互防衛條約」締結로 被侵時의 自動 介入條項은 규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韓․美 相互防衛條約」은 한국방위에 중요한 支柱 役割을 하고 있으며, 동 條約에 따라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므로서 共同 防衛任務를 수행하게 되었고, 韓․美 安保協力體制의 法的. 制度的 基調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주한미군 주둔의 根據를 提供하는 「韓․美 相互防衛條約」에 기초하여 한국안보를 위하여 설치된 裝置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韓․美兩國은 韓國安保를 위하여 서로 協助를 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韓․美 相互防衛條約」 제2조는 “外部로 부터의 武力攻擊에 의하여 威脅을 받고 있다고 어느 當事國이든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當事國은 서로 協議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미국이 한국에 威脅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威脅을 인정할 때는 상호 協議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둘째, 미국은 한국이 武力攻擊을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도록 援助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條約 제2조에서는 “自助와 相互 援助에 대하여 武力攻擊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手段을 지속하여 강화시킬 것이며 ....”라고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군사력으로서의 防衛手段을 강화하는 것과 그 강화는 自助方法과 援助方法으로 이루어 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防衛力을 강화시키는 援助를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이 미국에 대하여 軍援을 요구할 權利를 가지고 있는 條項이기도 하다.
    셋째, 한국이 武力侵攻을 받을때 미국은 공동 對處하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條約 제3조에는 “行政 支配下에 있는 領土 ...에 있어서의 武力攻擊을 自國의 平和와 安全을 危殆롭게 하는 것이라 인정하고 공통된 危險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憲法上의 手續에 다라 행동할 것을 宣言한다.”고 규정하여 締結 當事國이 자국의 영토에 대하여 공격을 받을 때는 반드시 지원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넷째,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의 根據를 제공하고 있다. 條約 제4조에는 “相互 合意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陸․海軍과 空軍을 대한민국 領土內와 그 周邊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受諾한다.”고 명시하여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을 위한 法的 根據를 만들었다.
    이상과 같이 條約상의 미국의 안보협력이 규정되어 있어 이에따라 미국은 安保協議, 美軍駐屯, 軍事力 强化를 위한 원조 제공, 被侵時의 지원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군주둔은 미국의 이 조약에 대한 이행의 根據가 되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安保支援 역할로 볼 수 있다.
 
第 3 節  美國 의 對韓半島 政策變化에 따른 駐韓美軍의 變遷 過程

                                                                             미국은 한국전쟁을 休戰으로 終結한뒤 한반도에 대한 중요성을 認識하여 「한․미 相互防衛條約」을 締結하는등 한국방어에 대한 확실한 意志를 나타내었다. 실제로 미국은 한반도가 對蘇聯 封鎖政策의 前進基地로서의 중요성과 對日本 威脅減少 次元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될 때에는 대체로 한반도에 대한 强硬策을 수행하여 왔으며 한반도및 東아시아 緊張이 緩和되었다고 판단할때는 柔軟한 政策을 수행하여 왔다. 한국전쟁이후 미국의 행정부가 바뀔때마다 한반도에 대한 정책이 변화하여 왔으며 이에따라 주한미군의 위상에 어떤 영향을 미쳐 왔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對蘇 封鎖 戰略
     미국은 한국전쟁 介入을 그 자체의 意義보다는 對蘇 封鎖 및 일본 방위라는 세계 戰略上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행하였다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따라서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休戰이 되자 미국은 한국과의 「韓․美 相互防衛條約」을 비롯하여 1954년 9월 동남아 국가들과의 防衛條約인「SEATO」, 12月에는 美․臺灣 防衛條約, 美․比防衛條約 그리고 濠洲및 뉴질랜드와의「ANZUS 條約」을 체결하여 외교적으로 소련 周邊國 우방과의 조약으로 소련의 膨脹을 봉쇄하고 군사적으로는 핵무기에 의한 大量 報復으로 전쟁을 抑止한다는 것이 었다. 즉, 적의 조그마한 도발에도 膺懲 수단으로 강력한 핵무기를 사용하여 報復하겠다는 전략이 었다. 大量報復에 있어 核彈 운반은 거의 대부분 戰略空軍에 의거 하였으므로 공군의 전투능력은 증가하였으나 육군과 해군은 오히려 감축하였다. 실제로 1960년의 美공군예산은 全國防豫算의 47%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은 蘇聯, 중국, 북한을 포함한 공산세력과 全面戰을 가상하고 대량보복의 樣相下에서 한국을 방위한다는 것이 었다. 즉, 한국에서 다시 共産侵略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값비싼 制限戰爭으로 끝낼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미국은 주한미군을 減少시키고 대신 핵무기를 반입함과 동시에 주한미공군도 核爆彈 投下가 가능한 最新銳機로 대치되었고, 이와 동시에 미국은 한국군 증강을 위하여 軍援을 대폭 제공하였다.
    한국전쟁 終了後의 미국의 이와같은 정책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認定하면서도 戰後 美軍의 대량 撤收에 따른 空白에 대하여 蘇聯이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警告性 戰略으로서 향후 한국전쟁과 같은 挑發을 억제하고저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對蘇 봉쇄를 위한 大量 報復 戰略은 사실상 局地的인 도발에 대해 핵보복을 가할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實效性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아 오던중 1961년 「케네디」대통령이 집권하게 되자 柔軟反應戰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전략을 채택하게 된 이론적 근거는 美․蘇間의 核均衡이 어느 정도 이루어질 경우 핵보복전력은 서로 相殺되고 在來式 군비만이 실제적인 대결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柔軟反應戰略은 직접적인 對蘇전략에 있어서는 戰略核 억지력으로서 「第 2攻擊能力」(Second Strike)인 報復力을 강화하고 「유럽」과 중공에 대해서는 각각 핵전술을 포함한 대규모 전쟁을, 한국을 포함한 기타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는 2. 5戰爭 戰略이었다. 유연 반응시대에서는 대량 보복시대에 비해 한국의 戰略的 비중이 다시 상승되었다. 왜냐하면 국지전에 대비할 一般目的軍(General Purpose Forces)의 전진배치가 중요하였기 때문에 중국이나 蘇聯의 膨脹을 국지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병력 배치 거점으로서 한국의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紛爭은 남북한만을 가정할때는 규모나 지역에 있어 局地戰이나 制限戰으로 규정할 수 있으나, 남한지역에서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은 美․蘇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임을 고려할 때 단순한 特殊戰의 성격을 띈 공산침략으로 보다 戰術核을 포함한 정규전 규모의 분쟁으로 算定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의 전략적 比重은 上昇되었지만 「유럽」이나 「월남」을 비롯한 다른 紛爭 지역에서는 미국의 一般 目的軍이 증가한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주한미군의 철수문제 거론없이 現狀維持政策을 유지하게 되었다.

2. 新 孤立主義 政策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최고 對外 목표였던 蘇聯의 影響力 봉쇄정책은 「닉슨」행정부가 들어서고 越南戰에서 패배함에 따라 다소 수정되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局地戰에서 미국이 개입하여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판단과 아울러 惡化 一路의 中․蘇 對立關係를 활용하면 「아시아」에서 중국 또는 蘇聯이 직접 참전하게 되는 局地戰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의거하여 「아시아」지역의 국지전에 대한 미국의 직접 參戰을 미국의 전략개념에서 除外한 것이다.
     1969년 7월 25일 「괌」島에서 宣言한「닉슨 닥트린」(Nixon Doctrine)은 지금까지 對蘇 强硬 일변도의 정책을 “對決에서 協商”이란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이 때부터 「아시아」지역으로 부터의 離脫을 추진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의 국지전에 대해서는 현지의 在來式 전력과 미국의 海․空軍力을 조화시킨 「統合戰力」(Combined Forces)으로만 對處하게 함으로서 미국은 필요에 따라
選擇的 介入의 여유를 가지는「新 孤立主義」정책을 모색하였던 것이
다.
     이러한 전략이 주한미군에 적용되어 한국군 자체 능력을 증강시키고 1971년 1개 師團을 철수함으로서 미국의 부담을 감소하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1977년 「카터」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軍事/經濟분야에 대한 壓力과 한국정부의 維新 정부하에서의 人權問題를 擧論하면서 82년까지 殘餘 1개 師團의 철수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1977 ~ 78년 미국 정보기관의 북한 군사력의 再評價와 東아시아에서의 蘇聯 군사력 특히, 해군력의 급격한 증강과 越南을 비롯한 東아시아 지역에서의 蘇聯의 膨脹勢力에 대한 再評價로 주한미군의 철수계획을 再수정하여 소규모의 병력만 철수하게 되었다.
    미국의 이와같은 新 孤立主義 정책에 따른 주한미군의 철수는 한국정부로 하여금 自主國防의 필요성을 認識케하여 自體 방위산업 육성에 拍車를 가하게 하였다. 또한 미국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우방으로남아 韓國防衛를 위하여 주한미군을 주둔시키지는 않을 것이며 미국의 國益에 따라 하시라도 撤收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3. 對蘇 힘의 優位政策

    1981년에 出帆한 「레이건」행정부는 과거 「닉슨」행정부의 脫아시아 정책 및 「카터」행정부의 아시아 輕視政策을 一擧에 번복하여 한국을 東北아시아의 前哨基地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한국 방문시 한국의 대통령과 정상회담후 발표한 성명에서 “韓半島의 戰爭抑制와 安保維持의 重要性”을 강조하고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이며, 나아가 전력을 강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韓國의 安保가 東北아시아의 平和와 安定에 主軸이 되며, 따라서 美國의 安保에도 대단히 重要하다”고 언명함으로서 「카터」행정부의 철군계획을 전면 白紙化하였다.
    「레이건」행정부는 對蘇 抑制力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그리고 태평양 沿岸國의 발전 가능성에 着眼하여 태평양지역 협력과 新經濟 협력체를 구상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와같은 미국의 새로운 對「아시아」전략은 反蘇聯 연합전선의 구축을 중심으로 하는 「레이건 닥트린」(Reaga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레이건 닥트린」의 핵심내용은 「나토」(NATO)로 結束되어 있는 西歐同盟에 맞먹을 수 있는 체제를 이 지역에 構築하기 위하여 미국의 강력한 우방인 일본 및 한국등과의 結束을 강화하고 중국을 準同盟國으로 끌어들여 극동에서 蘇聯의 南進을 저지하는 한편 「아세안」(ASEAN) 국가들로 하여금 공산「베트남」과 이를 지원하고 있는 蘇聯의 영향력 증대를 牽制하게 하자는 일종의 包圍戰略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이와같은 對蘇 힘의 優位戰略構想에 따라 한국의 중요성은 더욱 浮刻되게 되었고, 따라서 주한미군의 比重은 더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한국정부로서는 이 時期에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에관한  信賴性을 가장 확실히 가질 수 있었다.

4.  現狀 維持 政策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蘇聯을 위시한 東歐圈 공산국가들의 崩壞로 美․蘇 대결시대의 막이 내리고 미국 독주의 세계질서에 도달하자 미국의 「부시」대통령은 유럽과 일본의 經濟的 負擔을 강요하면서 유엔을 이용하여 세계질서유지를 위한 警察國家로서의 역할로 미국의 威信을 유지하고저 노력하였다. 「걸프」戰에서의 이락크에 대한 膺懲이 그 좋은 例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國際的 環境變化는  한반도에 대한 재평가에서 남북한이 戰略的인 군사력 均衡狀態를 유지하고 있고, 소련의 위협이 감소되었다는 판단으로 주한미군 減縮問題가 다시 擧論되기 시작하였다. 한․미 兩國 정부는 주한미군의 漸進的이고 단계적인 철수계획에 합의하였다. 1990년 2월 미국의 「체니」國防長官이 訪韓하여 合意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한미군의 非戰鬪兵力 7천명의 段階的 撤收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다. 둘째, 양측은 미군의 역할을 主導的 役割로 부터 補助的 役割로 변경할 것에 합의하였다. 또한 平時에는 한국군이 作戰權을 이양받아 행사하고, 戰時에는 미군이 작전권을 행사하는 계획을 논의하였다. 셋째, 양측은 주한미군의 비용을 한국정부가 매년 좀 더 負擔할 것에 합의하였다.
    미 國防省이 동년 4월 “넌․워너 修訂條項”에 따라 議會에 제출한 “아시아 太平洋 沿岸의 戰略骨格 : 21世紀를 내다보며” 란 報告書에 의하면 주한미군의 3단계 減軍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제1단계(1991~1993년)는 주한 美 空軍 병력 3천명과 미 지상군중 非戰鬪要員 5천명을 포함하여 7천명을 減縮 할 것이다. 제2단계(1993~1995년)는 1단계에서 미국은 북한의 위협과 변화상황을 재평가하여 2단계 목표를 설정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예정되었던 平時 作戰統制權은 1994년 12월 1일 한국군에게 이양되었다. 제3단계(1995~2000년)는 1, 2단계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한국은 主導的 役割(Leading Role)을 할수 있을 것이며, 주한미군은 戰爭 抑制力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소규모만이 남아 支援的 役割(Supporting Role)만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부시」행정부의 東아시아 防衛戰略構想(EASI)의 일환으로 발표된 이 계획의 제1단계 7천명 감축은 집행되었으나  2단계 감축계획은 북한의 핵문제로 凍結된 상태로 「클린턴」행정부로 인계되었다. 「클린턴」행정부는 1995년초 極東政勢의 재평가로 새로운 東아시아 防衛戰略構想으로 주한미군 3만 7천명을 포함한 10만명을 東아시아 지역에 향후 10년간 배치 유지하여 윈-앤-윈(Win and Win)戰略을 驅使할 것으로 발표하였다.
    지금까지 미국정부는 행정부가 바뀔때마다 그때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한반도를 위시한 東아시아地域 정책에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수 있다. 대체로 미국은 한반도내외의 긴장이 안정되었다는 판단을 토대로 한국내의 정치나 인권문제를 擧論하거나, 미국의 국외문제 不介入의 고립주의 정책이나 국방예산 削減으로 미국의 경제를 회복해 보겠다는 정책을  중요하게 擧論할 때는 주한미군 철수 정책 방향으로, 반면에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과 蘇聯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의 潛在的인 위협과 東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억제한다는 전략적 상황을 고려할 때는 주한미군의 現狀維持 내지는 戰力增强政策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으로 要約할 수 있을 것이다.
    重要한것은 미국의 이와같은 주한미군의 撤收및 增强정책은 한국정부나 국민의 意志에 관계없이 미국정부의 一方的인 정책에 의하여 左右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銘心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해방된 이래 美軍政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로 對美外交에 의존하여 왔기때문에 미국의 정책에 맞추어 한국의 對應策을 마련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주한미군 문제도 지금까지의 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른 주한미군의 位相變化 內容을 예의 분석하여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해 나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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